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중세 [[크로아트 왕국]]은 [[헝가리 왕국]]과 [[동군연합]]으로, [[16세기]] 크라이나 지방을 포함한 [[크로아티아 왕국]]이 [[모하치 전투]]로 [[러요시 2세]]가 전사하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위가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의 [[합스부르크 가문]]에 귀속되면서 [[오스만 제국]]에 대항하는 [[유럽]]의 최전선 중 하나가 되었다. [[크로아티아인]]이 우세한 곳이던 이 지역에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[[세르비아인]]이 이 일대로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[[합스부르크 가문]]에서 세르비아인을 오스만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하면서 수세기 만에 세르비아인들도 이 곳에서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게 되었다. 이러한 두 민족의 세력 균형 현상은 [[오스트리아 제국]],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을 거쳐 [[유고슬라비아 왕국]], [[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]]의 지배를 거쳐가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두 민족이 갈등 없이 살아가고 있을 때는 민족 화합의 상징으로서 기능하였다.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러한 세력 균형은 두 민족간의 갈등이 증폭될 경우 특정한 우위 세력이 없을 시에는 이러한 갈등이 곧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. 이는 [[1991년]]부터 발생한 [[유고슬라비아 내전]] 당시 상당한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던 [[슬로베니아]]가 큰 충돌 없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반면에 [[세르비아인]]이 일정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[[크로아티아]]와 [[보스니아인]], [[세르비아인]], [[크로아티아]]인 모두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[[보스니아]]는 엄청난 유혈 충돌 끝에야 겨우 독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. 이미 유고 내전 이전에 [[제 2차 세계대전]] 당시 [[크로아티아]]계 [[우스타샤]]와 [[세르비아]]계 [[체트니크]]가 서로 벌인 인종 학살은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 깊은 골을 남기고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있었다. 이것이 [[요시프 브로즈 티토]]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[[동유럽 혁명]] 이후 2년이 지난 1991년 이는 마침내 [[유고슬라비아 내전|재앙]]으로 이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